[부자 知] 세계 1위 슈퍼리치, 럭셔리 제국 - 루이비통, 아르노 씨

2023. 5. 20. 21:37by 글생도K - People, Books & Life

[글생도K  인물 탐색] LVMH, 프랑스 명품 재벌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최근에 방한

거슬러 올라가면 2010년 우리나라에 첫 방문

이번 발표된 세계 최고 부자 순위에서 테슬라 일론 머스크를 누르고, 1위를 했다.

LVMH는 약 80여 개의 명품 브랜드를 소유하고 있다. 연간 매출액 116조 원, 시가총액 약 670조 원인 기업이다.

에르메스는 올해 들어서 주가가 34% 올랐고, 또 5년 동안 주가가 무려 263% 상승했다.

샤넬은 지난해(2022년) 우리나라에서의 매출액이 1조 5천억 원 이상으로 2021년보다 30% 증가했고, 영업익은 4천129억 원으로 66% 늘었다. 샤넬은 주식 시장에 상장되어 있지 않다. 샤넬 재고재무책임자는 사기업으로 계속 남아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를 원한다고 말했고, 증권시장에 공개하거나 샤넬을 매각하거나 하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명품 시장 규모는 '세계 7위'에 해당한다. 1위 미국, 2위 중국 순이다. 근래 명품 소비가 늘어난 이유에는 K팝 아이돌들을 명품 앰버서더로 기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르노의 자산이 2100억 달러(274조)세계 1위 부자로 포브스 선정 후, 연금개혁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파리LVMH 본사앞에서 억만장자에게 돈을 거두어 연금재원을 마련하라고 시위하고 있는 모습

LVMN는 루이뷔통(Louis Vuitton)과 모엣샹동(Moet & Chandon), 헤네시(Hennessy)의 머릿글자를 딴 이름이다. 모에헤네시는 1971년 샴페인으로 유명한 모엣샹동과 코냑으로 유명한 헤네시가 합병돼 설립된 회사다. 아르노는 1987년 수많은 럭셔리 브랜드를 한 곳으로 모아 사업화하는 방안을 구상했다. 루이비통과 모에헤네시를 합병하면서 LVMH 제국이 만들어진 것이다.

 

2010년에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mault, 1949~ )루이비통 모에 헤네시(LVMH : Louis Vuitton-Moet-Henessy) 회장이 첫 방한했다.

12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한국의 주요 유통 업체 최고경영자들은 그를 만나기 위해 몸이 달았었다. 인천국제공항에 면세점을 운영하는 호텔신라와 롯데호텔이 특히 적극적이었다. 이건희 삼성 그룹 회장의 장녀인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당시 전무)은 직접 공항에 나가 아르노 회장을 영접했고, 신동빈 롯데 그룹 회장(당시 부회장)도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그를 접견했다. 포브스 선정 세계 네 번째 갑부(당시)이자 루이뷔통,, 크리스찬 디올, 지방시, 셀린느, 펜디 등 수십 여개의 럭셔리 브랜드를 소유한 명품 제국의 황제'다운 떠들썩한 행차였었다.

재벌 2, 3세 최고경영자들이 아르노 회장을 앞다퉈 만난 것은 인천국제공항에 있는 자사 면세점에 루이뷔통 매장을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루이비통은 공항 면세점은 품격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면세점에 매장을 내지 않았다. 하지만 인천국제공항은 다른 나라 공항보다 면세점이 화려하고 면적도 넓은데다 루이뷔통의 최대 고객으로 떠오르는 중국인들이 많이 방문하는 곳이어서 아르노 회장의 관심을 끌었다.

루이비통이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신라 면세점이었다. 롯데는 그룹 부회장이 나섰는데도 유치에 실패하자 인천공항공사가 호텔신라에 특혜를 줬기 때문이라며 소송까지 제기했지만 결국 무위로 끝났다. 그리고 2011년 추석 연휴 첫날, 신라면세점 내 루이비통 매장이 문을 열었다. 550제곱미터(166)의 큰 규모에 화려한 내외부 장식으로 확실히 눈에 띄는 이 매장은 유난히도 루이비통을 좋아하는 중국인 관광객들의 필수 관광 코스가 되었다.

미국식 M&A로 명품 제국을 일구다

명품의 사전적 의미는 극소수의 고객을 위해 오랜 시간 장인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희소성 높은 제품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명품이란 단어는 유명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값비싼 브랜드 제품을 뜻하는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명품으로 불리는 샤넬, 루이비통, 구찌 등 해외 유명브랜드 제품을 통칭하는 영어 단어는 ‘brand-name products(이름 있는 브랜드 제품)’, ‘designer label(디자이너 브랜드)’, luxury products(고급 사치품)‘ 등으로 ’명품‘이라고 번역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 때문에 언론계에서는 ’명품‘ 이라는 용어 대신 ’해외 유명 브랜드등으로 바꿔 쓰자는 자정노력도 벌어지고 있는 실정이다.

아르노가 명품 제국을 건설한 과정도 장인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

 

1949년 프랑스 북부 루베시에서 태어난 그는 명문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공학을 전공한 뒤 1971년 아버지가 운영하는 건설회사에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사업 수완이 좋았단 그는 입사 5년 만에 아버지를 설득해 사업 일부를 4,000만 프랑에 매각하고 부동산 사업에 집중해 큰 성과를 냈다. 1981년 그는 아버지 후임으로 회사 대표직을 맡게 됐지만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의 사회당 정부가 들어서자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돌연 미국으로 날아갔다.

 

몇 년 지나지 않아 프랑스 사회주의 정부가 경제정책 방향을 선회하자 아르노는 1984년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는 이때부터 명품에 관심을 두기 시작해, 파산 위기에 놓인 크리스찬 디올의 모기업 부삭(Boussac)'을 인수했다.

이후 크리스찬 라크로와, 셀린느 등을 인수하며 브랜드를 확장하던 아르노는 드디어 명품 브랜드의 대명사 루이뷔통을 손에 넣기로 한다. 대대로 가족 경영으로 이어 오던 루이비통은 1989년 기존 대주주가 치열한 법정 싸움에서 패배하면서 경영권이 아르노에게 넘어갔다.

 

그는 기업을 인수하면 직원들을 정리 해고해 잔인한 경영인이라는 악명을 얻었고, 1990년대에는 수많은 명품 브랜드를 인수하며 기업 사냥꾼으로 불리기도 했다. 의류, 화장품, 주류, 액세서리까지 그가 소유한 브랜드들은 종류도 다양하다. 그의 성공 방식은 프랑스적이기보다는 미국적 경영방식인 M&A였다. 이 때문에 캐시미어 정장을 입은 늑대’, ‘프랑스의 도널드 트럼트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2000년대 들어 외형 성장에 비해 수익성이 떨어지자 무차별 인수 전략은 속도를 늦췄다. 하지만 버킨 백등으로 유명한 에르메스 지분을 야금야금 사들여 20% 이상 확보하면서 또다시 적대적 M&A를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왔다. 에르메스 측은 아르노를 우리 정원이 침입자로 규정하면서 2011년 말 지분 50% 이상을 보유한 지주회사를 설립하는 등 경영권 방어에 적극적이다.

신분상승 욕망을 자극해 명품 대중화

하지만 아르노가 명품 제국을 일궈낸 비결은 브랜드 수집뿐만은 아니다. 미국적 마케팅 기법과 참신하고 젊은 디자이너 영입 등을 통해 제국을 변신시키고, 그 규모도 엄청나게 확장시켰다.

사실 아르노 회장에게 인수되기 전에는 루이비통을 비롯한 유럽의 명품 브랜드들은 100년이 넘도록 이어진 가족 경영과 소수 상류층만을 위한 맞춤 제작 방식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었다. 아르노는 이런 경영 방침을 과감히 바꿨다. 명품 브랜드를 많이 팔려면 품질보다 마케팅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찍 깨달은 것이다. ‘명품 대중화의 시작이다.

 

루이비통 브랜드의 창시자인 루이 비통(1821~1892)1800년대 귀부인들의 필수품이었던 트렁크를 튼튼하고 편리하며 개성적으로 디자인한 장인이었다. 유명한 ‘L'자와 ’V'자를 결합시킨 모노그램을 창안한 그의 아들 조로주 비통도 가업을 발전시킨 장인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명품 브랜드를 선전하는 고전적인 문구인 장인들의 한 땀 한 땀 바느질은 마케팅 수사로 전략한 지 오래다. 현재 루이뷔통 가방은 재봉틀 등 기계를 사용하고 분업화를 통해 생산된다.

 

유통망도 상류층 거주지의 작은 부티크에서 대형 백화점과 면세점으로 넓어졌다. 굳이 상류층이 아니어도 두툼한 지갑만 들고 오면 누구든지 명품을 살 수 있게 한 것이다. 결과는 놀라웠다. 상류층에 끼고 싶어 하는 중산층들을 대거 고객으로 영입하면서 매출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특히 아시아의 경제발전과 함께 일본, 한국, 중국 순으로 대중들의 명품 열기가 끓어오르면서 아시아는 최대 명품 소비 시장으로 떠올랐다.

 

아르노는 한편으로 명품의 대중화에 박차를 가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상류층에 대한 환상을 심어줄 수 있는 마케팅을 전개했다. TV 등 대중매체 광고를 하지 않고 루이뷔통컵 요트대회나 유명인사들을 초대한 파티를 통해 론칭쇼를 하는 식으로 고객들이 스스로를 상류층으로 여길 수 있게끔 하는 것이다.

 

루이비통이 가지고 있단 나이 든 세대를 위한 브랜드라는 고루한 이미지도 탈피했다. 1963년 미국 뉴욕 태생 30대의 젊은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를 1997년 아트 디자이너로 영입한 것은 당시 명품업계에 일대 파격이었다. 많은 이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제이콥스는 LV 모노그램 가방의 이미지로 고정돼 있던 루이비통 브랜드에 일대 도약을 일궈냈다. 크리스찬 디올에 존 갈리아노를, 디올 옴므에 에디 슬리먼을 영입하는 등 그가 직접 선택한 디자이너들은 각 브랜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창의성을 불어넣었다. 이 같은 안목을 바탕으로 그는 실제 디자인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며 깊숙이 관여한다고 밝힌 적이 있다.

 

아르노가 명품 제국의 황제로서 세계적 갑부가 된 데는 한국 여성들의 명품 가방 사랑도 한몫했다. 20061689억 원이었던 루이뷔통코리아의 매출액은 2008년 세계적인 금융위기를 겪고도 쭉쭉 늘어나 20114,973억 원을 기록했다. 현재 (2022년) 무려 1조 5000억 원이다.

 

최근 수년 동안 명품 브랜드들은 매년 가격을 두 자릿수 퍼센트씩 올렸는데도 수요가 전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아르노는 엄청난 돈을 벌어가면서도 기부는 거의 하지 않아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남들이 다 아는 유명한 가방을 가짐으로써 심리적 만족을 꾀하는 것은, 사실 ‘대중화’를 추구하면서 마치 ‘상류층의 전유물’ 인양 속이는 명품 업체들의 마케팅 전략에 놀아나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이미 명품 열기가 시들해졌다. 실용적이며 품질과 디자인이 뛰어나지만 가격도 착한 진정한 '명품'이 무엇인지 그들은 깨닫게 된 것이다. 

'한 땀 한 땀'이란 것은 거짓이며 눈속임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르노는 전통의 프랑스 브랜드 루이비통과 크리스찬 디올에 미국과 영국 출신의 젊은 디자이너를 채용하는 파격 인사를 주저하지 않았다. 마크 제이콥스와 존 갈리아노, 두 젊은 디자이너의 창의성을 수용한 브랜드는 클래식한 이미지를 벗고 젊고 혁신적인 이미지로 변신하며 명품 소비자의 폭을 넓혔다. 파격적인 인재 기용은 곧 파격적인 매출 신장으로 응답했다. 실제 크리스찬 디올은 존 갈리아노가 수석디자이너가 된 후 네 배 신장되기도 했다.